코친차이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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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친차이나 원정은 19세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제국주의적 야망을 드러내며 시작된 군사적 개입이다. 프랑스는 가톨릭 선교사 박해를 구실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했으며, 1858년 다낭을 점령하고, 1859년 사이공을 함락했다. 이후 끼호아 전투, 미토 점령, 비엔호아와 빈롱 점령 등의 주요 전투를 거치며 베트남은 프랑스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1862년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은 가톨릭 포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영토를 할양했으며,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로 인해 베트남은 프랑스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뜨득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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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2년 베트남 - 사이공 조약
사이공 조약은 1862년과 1874년 응우옌 왕조와 프랑스 사이에 체결되어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식민지화, 메콩강 삼각주 지배력 강화, 베트남 내 경제적·종교적 이권 확보를 통해 베트남 독립성 약화와 식민 지배 강화에 기여했으며,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코친차이나 원정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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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분 | 베트남의 유럽 선교사 처형 |
기간 | 1858년 9월 1일 – 1862년 6월 5일 (3년 9개월 4일) |
장소 | 남키, 대남 |
결과 |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승리 |
조약 | 사이공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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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스페인 스페인령 동인도 |
교전국 2 | 대남 |
지원국 | 미국 (퀴논 포격만 해당) |
지휘관 | |
프랑스 | 샤를 리고 드 주누이 프랑수아 파주 레오나르 샤르네르 루이 보나르 |
스페인 | 카를로스 팔랑카 구티에레스 |
미국 | 제임스 F. 셴크 프레더릭 K. 엥글 |
베트남 | 뜨득 황제, 응우옌찌프엉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 약 3,000명 프리깃함 1척 코르벳함 2척 아비소 2척 포함 9척 |
교전국 2 | 10,000명 이상 |
피해 규모 | |
교전국 1 | 1,000명 전사 및 부상 |
교전국 2 | 심각함 |
2. 배경
19세기 중반은 유럽 열강들이 신제국주의 기치 아래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던 시대였다. 프랑스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특히 인도차이나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7] 하지만 베트남에 직접 개입할 만한 명확한 명분은 부족한 상황이었다. 과거 자롱제가 떠이선 왕조와 벌인 전쟁을 프랑스인들이 도왔던 일을 근거로 일부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이 프랑스에 빚을 졌다고 주장했으나, 자롱제는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이 아니었고 조약도 이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36]
이러한 상황에서 베트남 내 가톨릭 문제는 프랑스에게 좋은 개입 구실을 제공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19세기 중반에는 수십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36][6][18] 이는 베트남 사회 내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베트남 조정은 가톨릭 확산을 외세의 침투로 간주하고 경계했으며, 특히 민망제, 티에우찌 황제, 뜨득 황제 시기에는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졌다.[36][7] 프랑스는 자국민 보호와 종교의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1840년대까지는 산발적인 대응에 그쳤다.[36][7]
상황이 급변한 것은 1857년, 뜨득 황제가 스페인 선교사 두 명을 처형한 사건이 제2차 아편 전쟁과 맞물리면서부터였다.[36][8]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극동에 와 있던 프랑스 군대를 베트남 침공에 동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1857년 11월, 소위 '문명화 사명'을 내세우며[8]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에게 베트남 원정을 명령했다.[36][8] 이에 따라 1858년 9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다낭(당시 명칭 투란)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코친차이나 원정이 시작되었다.[36][8][9][16][10]
2. 1.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진출 야망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제국주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명분이 부족했다. 19세기 초, 일부 프랑스인들은 베트남 황제 자롱제가 떠이선 왕조와의 전쟁 당시 프랑스의 지원에 빚을 졌다고 여겼다. 그러나 자롱제는 프랑스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을 이행하지 않았고, 자신을 도운 것은 피에르 피뇨 드 베엔과 같은 자원봉사자들이었기에 프랑스 정부에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프랑스에 특별한 혜택을 줄 이유가 없다고 보았고, 그와 후계자 민망제는 프랑스를 경계했다. 베트남은 프랑스 기술자들이 건설한 보방식 사이공 요새를 자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 프랑스 기술 지원은 필요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제 대포와 소총 구매에는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적인 관계는 프랑스의 야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4][5]프랑스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을 위해 흔히 사용했던 것처럼, 종교 탄압 문제를 개입의 명분으로 삼았다. 17세기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이 베트남에서 활동했으며, 19세기 중반에는 안남과 통킹 지역에 약 30만 명[36](혹은 펠레린 주교에 따르면 60만 명[6][18])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 이들 주교와 사제 대부분은 프랑스인이거나 스페인인이었다. 많은 베트남인들은 이러한 외국인 중심의 종교 집단을 불신하고 경계했다. 반면, 프랑스는 자국민과 가톨릭 신자들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내세우며 개입의 빌미를 찾았다. 1840년대 민망제와 티에우찌 황제 시기 가톨릭 선교사 박해는 프랑스의 산발적이고 비공식적인 보복을 유발했지만, 본격적인 군사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36][7]
1857년, 베트남 황제 뜨득이 스페인 선교사 두 명을 처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시기가 달랐다. 마침 제2차 아편 전쟁이 발발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극동 지역에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베트남에 개입할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1857년 11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문명화 사명''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에게 베트남에 대한 징벌 원정을 명령했다. 1858년 9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는 다낭에 상륙하여 도시를 점령했다.[36][8][9][16][10] 이는 프랑스가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을 목표로 인도차이나에 대한 군사적 침략을 본격화하는 신호탄이었다.

2. 2. 베트남 내 가톨릭 선교와 탄압
프랑스 선교사들은 17세기부터 베트남에서 활동해왔다. 19세기 중반에는 안남과 통킹 지역을 중심으로 가톨릭 신자 수가 약 30만 명[36]에서, 펠레린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60만 명[6][18]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교와 사제들은 프랑스인이거나 스페인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베트남인들은 이러한 외국인 지도자들이 이끄는 기독교 공동체를 불신하고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36] 프랑스는 점차 커지는 긴장 속에서 자국민을 포함한 가톨릭 신자들의 안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36]베트남 조정 역시 가톨릭 확산을 외세의 침투로 간주하고 경계했다. 특히 1840년대 민망제와 티에우찌 황제 재위 기간 동안 가톨릭 선교사에 대한 박해가 있었지만, 이때까지 프랑스의 대응은 산발적이고 비공식적인 수준에 머물렀다.[36][7]
상황이 바뀐 것은 뜨득 황제 때였다. 1857년, 뜨득 황제는 스페인 가톨릭 선교사 두 명의 처형을 승인했다.[7][8] 이전에도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시기적으로 제2차 아편 전쟁과 맞물렸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극동 지역에 원정군을 파견한 상태였고, 프랑스는 이 병력을 베트남에 개입시키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36][8] 결국 기독교 박해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할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36] 1857년 11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소위 '문명화 사명'을 내세우며[8]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에게 베트남에 대한 징벌적 원정을 명령했다.[36][8] 이에 따라 1858년 9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는 다낭(당시 명칭 투란)에 상륙하여 도시를 점령했다.[36][8][9][16][10] 이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본격적인 군사 행동의 시작이었다.[36][7]
3. 전개 과정
1858년 9월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다낭(당시 투란)을 공격하며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예상과 달리 베트남의 완강한 저항과 질병 등으로 인해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응우옌 찌 프엉이 지휘하는 베트남 군대에 의해 다낭에서 포위당하는 등 고전했으며, 기대를 모았던 베트남 기독교도들의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37]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다낭에서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베트남 군의 식량 보급처를 차단하기 위해 1859년 2월 남부의 사이공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점령 이후에도 병력 부족과 베트남군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때마침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줄어들었다. 1859년 11월,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의 후임으로 프랑수아 파즈 제독이 부임하여 영토 획득보다는 종교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조약을 추진했으나, 베트남 측의 거부로 협상은 결렬되었다.[38]
1860년, 프랑스가 중국에서 제2차 아편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서 베트남 주둔 병력 대부분이 중국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로 인해 사이공에 남은 소수의 프랑스-스페인 수비대는 약 4,000명의 베트남군에게 포위되는 등 수세에 몰렸고, 결국 1860년 3월 다낭에서는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39]
상황은 1861년 초, 중국에서의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반전되었다. 레오나르 샤르네르 제독이 청불전쟁에 투입되었던 대규모 함대와 병력을 이끌고 코친차이나로 복귀하여 사이공 구원에 나섰다. 증강된 연합군은 1861년 2월 24일과 25일, 끼호아 전투에서 사이공을 포위하고 있던 응우옌 찌 프엉의 군대를 격파하며 전세를 뒤집고 공세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40]
끼호아 전투 승리 이후, 연합군은 공세를 이어가 1861년 4월 미토를 점령했다.[41] 베트남 측은 게릴라 전술로 저항을 이어갔으나,[43] 1861년 11월 새로 부임한 루이 아돌프 보나르 제독은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그는 프랑스 선박 피습에 대한 보복으로 12월 비엔호아를 점령했으며,[44] 이듬해인 1862년 3월에는 게릴라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빈롱마저 함락시켰다.[45][46]
미토, 비엔호아, 빈롱 등 남부의 주요 거점들을 연이어 상실하자 후에의 뜨득 황제 조정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1862년 4월, 뜨득 황제는 프랑스 측에 평화 조약을 맺을 의사를 전달했으며,[47] 이후 협상을 거쳐 1862년 6월 5일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48]
3. 1. 다낭 점령 (1858년)

1858년 9월,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다낭(당시 투란)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연합군은 손쉬운 승리를 기대했지만, 작전은 처음부터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장담했던 것과 달리 베트남의 기독교도들은 프랑스를 지원하여 봉기하지 않았으며, 응우옌 찌 프엉이 지휘하는 조직화된 베트남 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훨씬 견고했다.
해병대 상륙 작전으로 도시를 점령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더 이상 내륙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베트남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다낭 포위전(투란 포위전)은 거의 3년 동안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교전은 비교적 적었지만, 연합군 측은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투란(다낭) 요새는 종종 증원되었고, 연합군은 가끔 베트남 요새를 기습하기도 했지만, 포위를 돌파하지는 못했다.[37][11]
1858년 10월, 투란(다낭) 함락 직후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점령한 요새가 별다른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통킹이나 코친차이나에서의 다른 작전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대규모 봉기가 필요한 통킹 원정은 위험 부담이 크다고 보고 거부했으며, 대신 베트남 군의 식량 보급처로서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코친차이나의 사이공에 대한 원정을 구상했다.[37][18]
3. 2. 사이공 점령 (1859년)
다낭 포위전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고 교착 상태에 빠지자,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는 다낭(투란) 점령이 큰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통킹이나 코친차이나에 대한 작전을 고려했다. 기독교도의 봉기에 의존해야 하는 통킹 원정은 위험 부담이 크다고 보아 제외하고, 1859년 1월, 베트남 군의 주요 식량 공급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코친차이나의 사이공 공격을 제안했다.[37]

원정이 승인되자, 1859년 2월 초 리고 드 주누이는 소규모 프랑스 수비대와 함선 두 척만 다낭에 남겨둔 채 주력 함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1859년 2월 17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사이공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강변의 요새와 방어 시설들을 차례로 파괴하고 사이공을 점령했다. 프랑스 해병대가 거대한 사이공 성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스페인군 소속의 필리핀인 부대는 베트남군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12]
그러나 연합군은 점령한 성채를 유지할 만큼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1859년 3월 8일, 성채를 폭파하고 막대한 양의 쌀이 저장된 식량 창고에 불을 질렀다. 4월,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다낭의 프랑스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약 1,000명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병력을 사이공에 남겨두고, 해군 장교 베르나르 조레기베리에게 지휘를 맡겼다.[12]
사이공 점령 역시 초기의 다낭 점령처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조레기베리가 이끄는 소규모 수비대는 1859년 4월 21일, 사이공 서쪽의 베트남군 요새를 공격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고 이후 수세에 몰렸다.[13] 때마침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정부는 이탈리아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고, 극동 지역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났다.[38]
1859년 11월,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프랑수아 파즈 제독으로 교체되었다. 파즈 제독은 베트남 영토 획득보다는 가톨릭 신앙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11월 초 베트남 측과 협상을 시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가 이탈리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베트남 측은 프랑스의 온건한 제안을 거부하고 협상을 지연시키며 연합군이 스스로 철수하기를 기다렸다. 11월 18일, 파즈 제독은 다낭 인근의 끼엔찬(Kien Chan) 요새를 포격하여 점령했지만, 이러한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측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전쟁은 해를 넘겨 1860년까지 이어졌다.[13][38]
1859년 말부터 1860년까지 연합군은 다낭과 사이공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비록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이 끝나기는 했지만, 프랑스는 1860년 초 중국과 제2차 아편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또다시 병력 분산 문제에 직면했다. 파즈 제독은 레오나르 샤르네르 제독이 이끄는 중국 원정군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 주둔 병력 대부분을 차출해야 했다. 1860년 4월, 파즈 제독은 코친차이나를 떠나 광저우에서 샤르네르 제독과 합류했다. 한편, 1860년 3월 약 4,000명의 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사이공 방어는 해군 대위 쥘 다르이에스에게 맡겨졌다. 약 1,000명에 불과했던 사이공의 프랑스-스페인 수비대는 1860년 3월부터 1861년 2월까지 압도적인 수의 베트남군에게 포위된 채 힘겨운 방어전을 벌여야 했다. 결국 프랑스는 사이공과 다낭 두 곳을 모두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860년 3월 다낭에서 철수하며 실패로 끝난 다낭 포위전의 막을 내렸다.[39]
3. 3. 끼호아 전투 (1861년)
청불전쟁이 끝나자 1861년 초, 프랑스는 사이공에서의 군사적 교착 상태를 타개할 기회를 맞이했다. 프랑스는 이전에 다낭에서는 철수했지만, 1860년까지 사이공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도시를 포위한 베트남 군대를 격퇴할 만한 충분한 병력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샤르네르 제독과 파즈 제독이 코친차이나로 돌아와 사이공 주변에서의 작전을 재개했다. 샤르네르 제독의 지휘 아래, 70척의 함선과 바스와뉴 장군이 이끄는 3,500명의 병력이 중국 북부에서 사이공으로 이동했다. 이 함대는 청불 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 직전 프랑스 극동 전대가 창설되기 전까지 베트남 해역에서 활동한 가장 강력한 프랑스 해군력이었다. 전대에는 샤르네르와 파즈 제독의 기함인 프랑스 해군 증기 프리깃 Impératrice Eugénie|앙페라트리스 외제니프랑스어와 Renommée|르노메프랑스어를 비롯하여, 코르벳함 Primauguet|프리모게프랑스어, Laplace|라플라스프랑스어, Du Chayla|뒤 샤일라프랑스어, 11척의 스크류 추진 통보함, 5척의 1급 포함, 17척의 수송선 및 병원선이 포함되었다. 또한, 마카오에서 구입한 6척의 무장 로르차(lorcha, 중국식 정크선)도 합류했다.
이러한 대규모 증원을 통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마침내 베트남 군대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1861년 2월 24일과 25일, 연합군은 사이공을 포위하고 있던 베트남 군대를 공격하여 응우옌 찌 프엉이 지휘하는 포위군을 끼호아 전투에서 격파했다. 베트남 군대는 진지를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이 과정에서 연합군 역시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40]
끼호아에서의 승리는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승리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는 코친차이나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3. 4. 비엔호아와 빈롱 점령 (1862년)
미토 점령은 레오나르 샤르네 제독의 마지막 군사적 성공이었다. 그는 1861년 여름 프랑스로 돌아갔고, 그의 후임으로는 1861년 11월 말 사이공에 도착한 루이 아돌프 보나르(1805-67) 제독이 임명되었다. 보나르 제독은 사이공 도착 2주 만에 주요 작전을 개시했는데, 이는 프랑스 화물선 '에스페란스(Espérance)'호가 매복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승무원들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동나이성을 침공하는 것이었다. 동나이성의 성도인 비엔호아는 1861년 12월 16일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다.[44][27]프랑스는 비엔호아 점령에 이어 빈롱성으로 공세를 이어갔다. 이는 미토 근처에서 프랑스군이 베트남 게릴라에게 공격당한 것에 대한 보복 작전의 성격을 띠었다. 특히 1862년 3월 10일, 보병 중대를 태우고 미토를 떠난 프랑스 포함이 갑작스럽게 폭발하여 5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측은 이 사건이 빈롱성 성주의 사주를 받은 베트남 저항 세력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했다.[45][28]
열흘 뒤인 1862년 3월 20일, 보나르 제독은 7척의 포함과 수송선, 그리고 1,000명 규모의 프랑스-스페인 연합 상륙군을 이끌고 빈롱으로 향했다. 3월 22일 오후와 저녁, 연합군은 빈롱성 앞에 구축된 베트남 포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다음 날인 3월 23일, 연합군은 빈롱성 성채 안으로 진입했다. 성을 지키던 베트남 관군은 미토 서쪽으로 20km 떨어진 미꾸이(My Cui)의 요새화된 토루로 후퇴했으나, 연합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격파했다. 이 과정에서 빈롱과 미꾸이에서 많은 베트남인 사상자가 발생했다.[46][29]

미토와 비엔호아를 잃고 빈롱마저 함락되자, 응우옌 왕조의 후에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결국 1862년 4월, 뜨득 황제는 프랑스 측에 평화 조약을 맺을 의사가 있음을 전달했다.[47][30] 1862년 5월, 후에에서 사전 조율을 거친 후 프랑스 코르벳함 '포르뱅(Forbin)' 호는 평화 조약을 체결할 베트남 전권대사를 맞이하기 위해 투란(오늘날의 다낭)으로 항해했다. 베트남 측이 전권대사를 보내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복사를 연구한 토마지(Thomazi) 대령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3일째 되는 날, 구식 외륜 코르벳함인 '에길 데 메르'(''Aigle des Mers'')가 투란 강을 천천히 떠나는 것이 보였다. 배의 낡고 처진 용골은 우리 선원들의 웃음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 배는 몇 년 동안 바다에 나가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배 위의 대포는 녹슬었고, 승선한 해병들은 누더기 차림이었으며, 배는 40척의 노 젓는 정크선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고 수많은 작은 배들의 호위를 받았다. 그 배에는 뜨득 황제의 전권대사들이 타고 있었다. '포르뱅' 호는 그 배를 끌고 사이공으로 갔고, 그곳에서 협상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마무리되었다. 6월 5일, 사이공 앞에 정박한 '뒤페레'(''Duperré'') 호 선상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48][31]
4. 주요 전투 및 사건
1861년 초, 중국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샤르네 제독과 파제 제독은 코친차이나로 돌아와 사이공 주변에서의 작전을 재개할 수 있었다. 샤르네 제독(당시 모든 육해군 지휘) 휘하의 70척 함대와 드 바소뉴 장군 지휘 하의 3,500명 병력이 중국 북부에서 사이공으로 이동했다. 샤르네 제독의 함대는 청불 전쟁 (1884년 8월~1885년 4월) 직전 프랑스 극동 함대가 창설되기 전까지 베트남 해역에서 가장 강력한 프랑스 해군력이었다. 이 함대는 증기 프리깃함 ''임페라트리스 외제니''와 ''르노메''(각각 샤르네와 파제의 기함), 코르벳함 ''프리모게'', ''라플라스'', ''뒤 샤일라'', 나사 추진식 파견선 11척, 1급 포함 5척, 수송선 17척, 병원선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마카오에서 구입한 무장 로르차도 동행했다.[19]
이러한 대규모 증원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사이공에서의 전술 기동을 펼칠 수 있는 병력을 제공했다. 1861년 2월 24일과 25일, 연합군은 베트남군의 포위선을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끼호아 전투에서 응우옌 트리 푸옹 원수를 격파했다. 베트남군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연합군에게 상당한 사상자를 입혔으나, 결국 패배했다.[20]
끼호아 전투에서의 승리로 작전 주도권을 되찾은 연합군은 공세를 이어갔다. 1861년 4월, 사이공 남서쪽에 위치한 미토 시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다. 해군 대위 앙투안 루이 르 쿠리올 뒤 퀼리오가 이끄는 공격 부대는 소규모 포함 함대의 지원을 받아 바오 딘 하 강을 따라 북쪽에서 미토로 진격하여 여러 베트남 요새를 파괴했다. 동시에 샤르네 제독이 파견한 파제 제독 지휘 하의 함대가 메콩강을 통해 해상으로 미토에 접근했다. 양동 작전에 의해 미토는 1861년 4월 12일, 별다른 전투 없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다.[21]
미토 점령 직전인 1861년 3월, 프랑스는 뚜득에게 다시 평화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1859년 11월 파제 제독이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가혹한 조건으로, 베트남 내 기독교의 자유 보장, 사이공 지방의 할양, 400만 피아스트르의 배상금 지불, 베트남 내에서의 자유로운 상업 및 이동 보장, 프랑스 영사관 설치 등을 요구했다. 뚜득은 종교의 자유만 인정했을 뿐 다른 모든 요구는 거부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미토가 함락되자 프랑스는 미토 지방까지 영토 요구 목록에 추가했다.[22]
정규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상대하기 어려워진 뚜득은 게릴라 전쟁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는 점령된 베트남 지역에 요원들을 보내 저항 운동을 조직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샤르네 제독은 1861년 5월 19일 사이공과 미토 지방에 공식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프랑스군은 코친차이나 시골 지역을 수색하며 반군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잔혹하게 다루었고, 이는 오히려 베트남 민중의 저항 의지를 더욱 불태우는 결과를 낳았다. 샤르네 제독은 평화로운 마을 주민에 대한 폭력을 자제하라고 명령했지만, 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베트남 게릴라들은 때때로 프랑스군을 위협했는데, 1861년 6월 22일에는 약 600명의 베트남 반군이 고콩의 프랑스군 전초 기지를 공격했지만 점령에는 실패했다.[23]
4. 1. 투란 포위전 (1858-1860)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지만, 작전은 처음부터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베트남 내 기독교인들이 프랑스를 지원하여 봉기할 것이라는 선교사들의 예상과 달리 실제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조직화된 베트남 군의 저항은 예상보다 훨씬 견고했다. 연합군은 다낭을 점령한 이후 더 이상 내륙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응우옌 찌 프엉이 지휘하는 베트남 군대에 의해 포위당했다. 다낭 포위전은 거의 3년 가까이 이어졌으며, 교전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질병으로 인해 연합군 측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연합군은 투란(다낭) 요새에 병력을 증원하고 때때로 베트남 진지를 기습하기도 했지만, 포위를 돌파하지는 못했다.[37][11]
1858년 10월, 투란 함락 직후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점령한 투란 요새가 전략적으로 큰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통킹이나 코친차이나에서의 새로운 작전을 검토했다. 통킹 원정은 기독교인들의 대규모 봉기가 성공의 관건이었기에 위험 부담이 크다고 보고 기각했다. 대신 1859년 1월, 그는 해군부에 베트남 군의 주요 식량 공급지로서 전략적 중요성이 큰 코친차이나의 사이공에 대한 원정을 제안했다.[37][18]
원정이 승인되자, 리고 드 주누이는 1859년 2월 초 소규모 프랑스 수비대와 함포 2문을 남겨두고 다낭을 떠나 남쪽의 사이공으로 향했다. 1859년 2월 17일, 연합군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베트남 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요새와 방책들을 파괴한 뒤 사이공을 점령했다. 프랑스 해병대가 거대한 사이공 요새를 습격했고, 스페인 군대의 필리핀인 부대는 베트남 군의 반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점령한 성을 유지할 만큼 충분한 병력이 없었고, 결국 1859년 3월 8일 성을 폭파하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질렀다. 4월, 리고 드 주누이는 압박받고 있던 투란의 수비대를 보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다시 투란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이공에 약 1,000명의 프랑스-스페인 병력을 남겨두고, 훗날 프랑스 해군장관이 되는 Bernard Jauréguiberry|베르나르 주헤기베리프랑스어에게 지휘를 맡겼다.[37]
그러나 사이공 함락 역시 투란 함락처럼 연합군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Bernard Jauréguiberry|베르나르 주헤기베리프랑스어가 지휘하는 소규모 수비대는 1859년 4월 21일 사이공 서쪽의 베트남 요새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은 후 수세에 몰렸다. 한편,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오스트리아-사르디니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정부는 이탈리아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 극동 지역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1859년 11월,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프랑스와 파즈 제독으로 교체되었다. 파즈 제독은 베트남에서 영토를 획득하는 대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약을 맺으라는 지시를 받았다.[38]
파즈 제독은 11월 초 베트남 측과 협상을 시작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가 이탈리아 문제에 쏠려 있다는 것을 간파한 베트남 조정은 프랑스 측의 온건한 조건조차 거부하며 협상을 지연시켰다. 베트남은 연합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결국 원정을 포기하기를 기대했다. 1859년 11월 18일, 연합군은 투란 인근의 끼엔짠(Kien Chan) 요새를 포격하여 함락시켰지만, 이러한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협상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전쟁은 1860년까지 계속되었다.[38]
1859년 후반부터 1860년 내내 연합군은 투란과 사이공의 수비대를 제대로 보강하지 못했다.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곧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1860년 초 프랑스는 다시 중국과 제2차 아편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파즈 제독은 휘하 병력 대부분을 레오나르 샤르네르 제독이 이끄는 중국 원정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해야 했다. 1860년 4월, 파즈 제독은 코친차이나를 떠나 광저우에서 샤르네르 제독과 합류했다. 그 사이 1860년 3월, 약 4,000명의 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사이공 방어는 d'Ariès|다리에스프랑스어 대령에게 맡겨졌으며, 약 1,000명에 불과한 프랑스-스페인 수비대는 1860년 3월부터 1861년 2월까지 압도적인 수의 베트남 군에게 포위된 채 고립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사이공과 투란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1860년 3월 투란 요새를 포기하고 철수함으로써 투란 포위전은 실질적인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39]
4. 2. 사이공 포위전 (1859-1861)
다낭 포위전이 장기화되고 투란(다낭) 점령의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는 기독교도의 봉기에 의존해야 하는 통킹 원정은 위험 부담이 크다고 보고, 1859년 1월 해군성에 베트남 군의 주요 식량 공급지인 코친차이나의 사이공 공격을 제안했다.[18][37]
제안이 승인되자, 리고 드 주누이는 1859년 2월 초, 투란의 수비대를 토용(Thoyon) 대령에게 맡기고 주력 함대를 이끌고 사이공으로 향했다. 2월 17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사이공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방어 시설을 차례로 파괴하고 사이공을 점령했다. 프랑스 해병대가 거대한 사이공 성채를 공격했고, 스페인군 소속 필리핀인 부대는 베트남군의 반격을 막아냈다.[12][37] 그러나 연합군은 점령한 성채를 유지할 병력이 부족했고, 결국 1859년 3월 8일 성채를 폭파하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철수했다. 4월, 리고 드 주누이는 투란의 수비대를 강화하기 위해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북상했으며, 사이공에는 함장 베르나르 조레기베리가 지휘하는 약 1,000명의 프랑스-스페인 수비대만 남겨두었다.[12][37]
사이공 점령 역시 투란 점령처럼 연합군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주지 못했다. 조레기베리의 소규모 부대는 1859년 4월 21일 사이공 서쪽의 베트남 요새를 공격하다가 상당한 손실을 입고 방어 태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13][38] 설상가상으로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정부는 극동 문제에 집중하기 어려워졌다.[38][13]
1859년 11월,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프랑수아 페이지 제독으로 교체되었다. 페이지 제독은 베트남 영토 획득보다는 가톨릭 신앙 보호를 위한 조약 체결을 우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프랑스가 이탈리아 문제에 묶여 있다는 것을 간파한 베트남 측은 유리한 조건을 거부하고 협상을 지연시켰다. 베트남은 연합군이 결국 철수할 것으로 기대했다. 페이지 제독은 1859년 11월 18일 투란 인근의 끼엔찬(Kien Chan) 요새를 점령했지만, 이 군사적 행동도 베트남의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38][13]
1860년에 들어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은 끝났지만, 이번에는 프랑스가 중국과의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페이지 제독은 레오나르 샤르네르 제독의 중국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 대부분을 차출해야 했고, 1860년 4월에는 직접 광저우로 이동했다. 이 공백을 틈타 1860년 3월, 응우옌 찌 프엉이 이끄는 약 4,000명의 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사이공 방어는 해군 대위 쥘 다르이에스(Jules d'Ariès)에게 맡겨졌다. 약 1,000명에 불과했던 프랑스-스페인 수비대는 압도적인 수의 베트남군에게 포위된 채 1860년 3월부터 1861년 2월까지 고립된 상태로 저항해야 했다. 결국 연합군은 사이공과 투란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860년 3월 투란에서 철수하며 투란 원정의 실패를 공식화했다.[39]
4. 3. 끼호아 전투 (1861)
1860년 사이공을 점령한 프랑스는 도시를 포위한 베트남군을 돌파할 만한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해 군사적 교착 상태에 빠졌다.[13] 그러나 청불전쟁이 끝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861년 초, 레오나르 샤르네르 제독과 프랑수아 파즈 제독이 코친차이나로 돌아와 사이공 주변의 작전을 재개했다. 샤르네르 제독은 70척의 함선과 3,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중국 북부에서 사이공으로 이동했다. 그의 함대는 당시 베트남 해역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으며, 기함인 프랑스 해군 증기 프리깃 앙페라트리스 유지니(Impératrice Eugéniefra)와 레노미(Renomméefra)를 비롯해 코르벳함 프리모기(Primauguetfra), 라플라스(Laplacefra), 뒤쉘라(Du Chaylafra), 11척의 스크류 구동 디스패치 선, 5척의 일급 포함, 17척의 수송선 및 병원선, 그리고 마카오에서 구입한 6척의 무장 로르차(화물선) 등으로 구성되었다.이렇게 강화된 전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1861년 2월 24일과 25일, 사이공을 포위하고 있던 베트남군을 공격했다. 이 끼호아 전투에서 연합군은 응우옌 찌 프엉이 이끄는 베트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승리했다. 베트남군은 자신들의 진지를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패배했고, 연합군 역시 상당한 사상자를 기록했다.[40] 끼호아에서의 승리는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4. 꾸이년 포격 (1861)

꾸이년 포격은 1861년 7월 31일, 베트남 퀴논(꾸이년)을 방어하던 요새가 미국 해군 군함 USS 새기노에 의해 파괴된 사건이다.[24][25][26] 이 사건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베트남을 식민화하던 시기에 발생했다.
당시 동인도 전단 소속이던 제임스 F. 쉥크 사령관은 미국 남북 전쟁의 북군 해상 봉쇄에 합류하기 직전, 실종된 미국 상선 '머틀'호의 선원들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슬루프 함선인 USS ''새기노''를 이끌고 퀴논으로 향했다. USS ''새기노''는 50파운드(약 23kg) 포, 32파운드(약 15kg) 포 1문, 24파운드 포 2문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50명의 장교와 병사가 탑승하고 있었다.
1861년 7월 31일, USS ''새기노''가 퀴논 항구에 진입하여 닻을 내리려 할 때, 약 550m 떨어진 북쪽 요새에서 포격을 받았다. 미국 측은 백기를 게양하여 적대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으나 포격은 계속되었다. 이에 쉥크 사령관은 안전한 거리(약 820m)로 배를 물린 뒤 반격을 명령했다. 미군의 32파운드 포를 시작으로 포격이 시작되었고, 약 20분 만에 베트남 측 포대는 잠잠해졌다. 이후 요새 내부에서 큰 폭발이 관측되었는데, 이는 화약고나 포 자체가 터진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 측의 포격이 멈춘 뒤에도 USS ''새기노''는 약 30분간 더 포격을 계속하여 요새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 교전에서 미군은 아무런 피해나 사상자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 측 수비대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종된 미국 선원들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USS ''새기노''는 같은 날 홍콩으로 철수했다.[24][25][26] 쉥크 사령관은 이후 미국 남북 전쟁 중 포트 피셔 전투에서 활약했다.
4. 5. 비엔호아 점령 (1861)
미토 점령은 레오나르 샤르네 제독의 마지막 군사적 성공이었다. 그는 1861년 여름 프랑스로 돌아갔고, 1861년 11월 말 사이공에 도착한 루이 아돌프 보나르 제독이 후임 지휘관이 되었다. 보나르 제독은 사이공 도착 2주 만에, 프랑스 로르차(화물선) ''에스페랑스'' 호가 승무원과 함께 매복 공격으로 손실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동나이성을 점령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동나이성의 성도인 비엔호아는 1861년 12월 16일에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다.[27]4. 6. 빈롱 점령 (1862)
미토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한 베트남 측의 게릴라 공격이 이어지던 중, 1862년 3월 10일 미토를 출발한 프랑스 포함이 갑자기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폭발로 52명의 프랑스군 사상자가 발생하자, 프랑스 측은 빈롱 성의 성주가 사주한 베트남 저항 세력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다.[45][28]이에 루이 아돌프 보나르 제독은 보복을 명분으로 빈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사건 발생 열흘 후, 보나르 제독은 7척의 디스패치함과 포함 (다른 기록에는 군함과 수송선 11척)[29]으로 구성된 함대와 1,000여 명의 프랑스-스페인 연합 상륙군을 이끌고 빈롱으로 향했다.[45][29]
1862년 3월 22일 오후와 저녁,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빈롱성 앞에 구축된 베트남군 포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다음 날인 3월 23일에는 빈롱성 성채 안으로 진입했다.[45][29] 성을 지키던 베트남 관군은 미토 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미꾸이(My Cui)의 요새화된 토치카로 후퇴했으나, 연합군의 추격을 받고 격퇴되었다. 이 과정에서 빈롱과 미꾸이에서 베트남 측은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46][29]
이미 비엔호아와 미토를 상실한 데 이어 빈롱마저 함락되자 후에의 응우옌 왕조 조정은 큰 충격에 빠졌다. 결국 뜨득 황제는 1862년 4월, 프랑스 측에 평화 조약을 맺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게 된다.[47][30]
5. 사이공 조약 (1862)
소규모 징벌로 시작했던 원정은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는 빈손으로 철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베트남에게 식민 지배 조건을 강요하려 했다.[32]
결국 뜨득 황제의 전권대사인 판타인잔은 1862년 6월 5일, 프랑스 측 보나르 제독과 스페인 대표 Carlos Palanca y Gutierrez|카를로스 팔란카 이 구티에레스es 대령과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베트남 영토 내에서 가톨릭 신앙의 자유로운 실천 및 포교 활동을 허용한다.
- 비엔호아 성, 자딘 성, 딘투엉 성 등 베트남 남부 3개 성과 꼰다오 섬을 프랑스에 할양한다.
- 프랑스에게 메콩강을 따라 자유롭게 무역하고 여행할 권리를 허용한다.
- 다낭(투란), 꽝옌, 바락(홍강 어귀) 항구를 무역항으로 개방한다.
- 10년에 걸쳐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총 100만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할양받은 남부 3개 성을 해군부의 행정 하에 두었고, 사이공을 수도로 하는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47][30]
6. 결과 및 영향
1864년 프랑스에 할양된 베트남 남부 3개 성은 공식적으로 코친차이나라는 이름의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49][33] 3년 뒤인 1867년, 피에르 드 라 그랑디에르 제독은 베트남 정부를 압박하여 쩌우독, 하띠엔, 빈롱 3개 성을 추가로 프랑스에 넘기도록 강요했다.[49][33] 이로써 프랑스의 코친차이나 식민지는 기존보다 두 배로 확장되었다.
베트남의 뜨득 황제는 처음에는 이러한 강제 할양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킹 지역에서 프란시스 가르니에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군사적 압박이 가해진 후, 결국 1874년 폴루이펠릭스 필라스트르의 중재로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베트남은 코친차이나 6개 성 전체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49][33]
원정에 함께 참여했던 스페인은 전쟁 배상금의 일부를 받았지만, 베트남 내에서 영토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프랑스는 스페인에게 통킹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권유하기도 했으나, 구체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통킹 지역 역시 1883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편입되었다.[50][34]
뜨득 황제가 평화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옛 레 왕조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톨릭 귀족 레바오프엉(Lê Bảo Phụng)이 통킹에서 일으킨 대규모 봉기였다. 이 봉기는 뜨득 황제의 권위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비록 프랑스와 스페인은 레바오프엉이 제안한 반(反) 뜨득 동맹을 거절했지만, 통킹의 반란군은 여러 차례 정부군을 격파하며 세력을 떨쳤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결되면서 뜨득 황제는 군사력을 집중하여 통킹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정부의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레바오프엉은 결국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뒤 처형되었다.[51][35]
7. 관련 인물
코친차이나 원정의 주요 관련 인물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측'''
- 샤를 리고 드 주누이: 프랑스 해군 제독. 원정 초기 사령관으로 다낭과 사이공 점령을 지휘했다.
- 프랑스와 파즈: 프랑스 해군 제독. 리고 드 주누이의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했으나, 제2차 아편 전쟁으로 병력 대부분을 중국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 레오나르 샤르네르: 프랑스 해군 제독. 제2차 아편 전쟁 종료 후 증원군을 이끌고 코친차이나로 복귀하여 끼호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 루이 아돌프 보나르: 프랑스 해군 제독. 샤르네르의 후임으로 비엔호아, 빈롱 등을 점령하고 베트남과 사이공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베트남 측'''
- 뜨득 황제: 응우옌 왕조의 황제.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항전을 지휘했으나, 계속된 패배와 내부 반란으로 결국 강화를 결정했다.
- 응우옌 찌 프엉: 베트남의 장군. 다낭과 사이공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했으나 끼호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 판타인잔: 베트남의 고위 관리. 뜨득 황제의 명을 받아 프랑스 측과 협상하여 불리한 조건의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7. 1. 프랑스 측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은 초기에는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으나, 베트남 측의 예상보다 강력한 저항과 응우옌 찌 프엉이 이끄는 군대에 포위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다낭 포위전은 약 3년간 지속되었으며, 교전 자체보다는 질병으로 인한 사상자가 더 많았다.[37]
1858년 10월, 다낭(투론) 함락 직후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투론 점령의 실효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공격 목표를 모색했다. 그는 기독교도의 지원 봉기가 불확실한 통킹 대신, 베트남 군의 식량 보급 중심지인 코친차이나의 사이공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1859년 1월, 이 제안이 승인되자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2월 초 소규모 프랑스 수비대와 함포를 이끌고 사이공으로 향했다.
1859년 2월 17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방어선을 돌파하고 요새와 방책을 파괴하며 사이공을 점령했다. 프랑스 해병대가 요새를 습격했고, 스페인 군대의 필리핀인 부대는 베트남의 반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점령한 성을 유지할 병력이 부족하여 1859년 3월 8일 성을 폭파하고 식량고를 불태웠다. 4월,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다낭의 수비 강화를 위해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고, 사이공에는 약 1,000명의 프랑스-스페인 병력을 베르나르 주헤기베리(훗날 프랑스 해군장관)의 지휘 아래 남겨두었다.
사이공 함락은 초기 다낭 함락처럼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주지 못했다. 베르나르 주헤기베리가 이끄는 소규모 병력은 1859년 4월 21일 베트남 요새의 기습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후 수세에 몰렸다. 또한,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발발로 프랑스 정부의 관심이 유럽으로 쏠리면서 극동에서의 군사 작전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1859년 11월,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은 프랑스와 파즈 제독으로 교체되었다. 파즈 제독은 영토 획득보다는 종교 보호 조약 체결을 지시받았으나, 프랑스의 상황을 파악한 베트남 측이 협상을 지연시키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월 18일 끼엔짠 요새를 포격하여 함락시켰지만, 베트남의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38]
1860년 초 프랑스가 다시 중국과의 전쟁(제2차 아편 전쟁)에 개입하면서 파즈 제독은 대부분의 병력을 중국 전선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이로 인해 사이공 방어는 더욱 취약해졌고, 1860년 3월 약 4,000명의 베트남 군대가 사이공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1860년 3월부터 1861년 2월까지 다리에스 선장이 지휘하는 약 1,000명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압도적인 수의 베트남군에게 포위된 상태로 방어전을 치러야 했다. 결국 연합군은 사이공과 다낭(투론)을 동시에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860년 3월 다낭 요새를 포기하고 철수했다.[39]
1861년 초, 중국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레오나르 샤르네르 제독과 파즈 제독은 코친차이나로 복귀하여 작전을 재개했다. 샤르네르 제독의 지휘 아래 70척의 함선이 바스와뉴 장군이 이끄는 3,500명의 병력을 싣고 중국 북부에서 사이공으로 이동했다. 이 함대는 당시 프랑스가 극동에 보유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이었으며, 기함인 프랑스 해군 증기 프리깃 Impératrice Eugénie|앙페라트리스 외제니프랑스어와 Renommée|르노메프랑스어, 코르벳함 Primauguet|프리모게프랑스어, Laplace|라플라스프랑스어, Du Chayla|뒤 샤일라프랑스어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강력한 전력 증강에 힘입어 연합군은 1861년 2월 24일과 25일, 끼호아 전투에서 응우옌 찌 프엉이 이끄는 베트남 포위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사이공 포위를 풀었다. 이 전투는 치열했으며 연합군 측 사상자도 상당했다.[40]
끼호아 전투 승리 이후 프랑스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1861년 4월, 소규모 포함 선단의 지원을 받은 레 쿠리오 드 뀔리오 군함 대위의 공격대가 바오딘하 수로를 따라 북쪽에서 미토로 진군하며 여러 베트남 요새를 파괴했고, 파즈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메콩강을 통해 해상에서 접근했다. 1861년 4월 12일, 미토는 별다른 저항 없이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41] 미토 함락 직전인 1861년 3월, 프랑스는 뜨득 황제에게 이전보다 훨씬 가혹한 조건(기독교 포교 자유, 사이공 할양, 4백만 냥(piastres) 배상금, 통상 및 이동 자유, 프랑스 영사관 설치)을 제시했으나, 뜨득 황제는 종교 자유 외에는 거부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프랑스는 사이공과 미토를 포함한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42] 뜨득 황제는 게릴라전을 호소하며 저항을 조직화했고, 이에 샤르네르 제독은 5월 19일 사이공과 미토 지역을 포위 공격 상태로 선포하고 반란군에 대한 강경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가혹 행위가 민중의 저항을 부추기기도 했다. 1861년 6월 22일에는 고꽁의 프랑스 초소가 600명의 베트남 저항군에게 공격받는 등 게릴라전은 프랑스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43]

해상, 유로피앵 호 선상에서, 1863년 7월.
1861년 여름, 샤르네르 제독은 프랑스로 귀국했고, 루이 아돌프 보나르 제독이 후임으로 임명되어 11월 말 사이공에 도착했다. 보나르 제독은 도착 직후 프랑스 화물선 Espérance|에스페랑스프랑스어 호와 승무원이 매복 공격을 받은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동나이 성을 공격하여 1861년 12월 16일 성도인 비엔호아를 점령했다.[44] 1862년 3월 10일, 미토 근처에서 보병 중대를 태운 프랑스 포함이 폭파되어 큰 피해(52명 사상)를 입자, 프랑스는 이를 빈롱 성주가 사주한 게릴라 공격으로 간주하고 보복에 나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보나르 제독은 3월 22일 빈롱 성을 공격했다. 3월 22일 오후와 저녁,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빈롱성 앞의 베트남 포대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23일에는 성채 내부로 입성했다. 수비하던 베트남군은 미토 서쪽 20km 지점의 미꾸이 요새로 후퇴했으나, 연합군의 추격으로 격퇴당하고 북쪽으로 퇴각했다.[46]
미토, 비엔호아, 빈롱의 연이은 함락은 후에의 뜨득 황제 조정을 압박했다. 1862년 4월, 뜨득 황제는 평화 조약을 체결할 의사를 밝혔다.[47] 5월, 프랑스 코르벳 포르방(Forbin) 호가 다낭(투란)에서 베트남 전권대사를 태우고 사이공으로 이동했다. 베트남 측 대표단이 타고 온 낡은 배 Aigle des Mers|에글 데 메르프랑스어는 프랑스 선원들의 조소를 사기도 했다. 사이공에서 진행된 협상은 빠르게 마무리되었고, 1862년 6월 5일, 사이공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함선 Duperré|뒤페레프랑스어 호 선상에서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48]
7. 2. 베트남 측
프랑스군이 다낭에서 철수한 후 사이공을 점령했지만(1860년), 사이공을 포위한 베트남군의 저항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당시 베트남을 통치하던 응우옌 왕조의 뜨득 황제는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응우옌 찌 프엉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군은 끼호아 전투(1861년 2월 24일~25일)에서 증원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사이공 외곽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베트남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최신 무기로 무장한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40]끼호아 전투 패배 이후 베트남군은 수세에 몰렸다. 프랑스군은 공세를 강화하여 1861년 4월에는 미토를 점령했다.[41] 프랑스는 미토 점령 직전인 1861년 3월, 뜨득 황제에게 더욱 가혹한 조건(기독교 포교 자유, 사이공 할양, 4백만 냥(piastres)의 면제[42], 통상/이동 자유, 영사관 설치 등)을 제시했으나, 뜨득 황제는 종교의 자유 외에는 수용을 거부했다.[42] 정규군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자 뜨득 황제는 전략을 바꿔 게릴라전을 통해 저항을 이어가도록 지시했다. 프랑스군은 이에 사이공과 미토 지역을 포위 상태로 선포하고 저항 세력에 대한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폭력이 발생하기도 하여 베트남 민중의 저항 의지를 더욱 부채질했다. 베트남 게릴라 부대는 1861년 6월 22일 고꽁의 프랑스 초소를 공격하는 등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위협을 가했다.[43]
프랑스군은 베트남의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공세를 계속했다. 루이 아돌프 보나르 제독은 프랑스 선박 에스페란스 호 피습 사건을 빌미로 1861년 12월 비엔호아를 점령했고,[44] 1862년 3월에는 미토 근처에서의 게릴라 공격과 프랑스 포함 폭파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빈롱을 함락시켰다. 빈롱의 베트남 수비군은 미꾸이 요새로 후퇴했으나 결국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격파당했다.[45][46]
잇따른 패배와 영토 상실, 특히 빈롱 함락은 후에의 뜨득 황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더불어 옛 레 왕조의 후손을 자처하는 레바오프엉이 일으킨 북부 통킹 지역의 반란으로 내부적인 위협까지 커지자, 뜨득 황제는 결국 프랑스와의 강화를 결정했다.[47][51] 1862년 4월, 뜨득 황제는 평화 협상 의사를 밝혔고, 5월에는 판타인잔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사이공으로 파견했다. 판타인잔은 낡고 초라한 배를 타고 협상 장소로 향했으며, 이는 당시 베트남의 어려운 처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48]
1862년 6월 5일, 판타인잔은 프랑스 측 보나르 제독 및 스페인 대표 팔란카 이 구티에레즈와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베트남은 가톨릭교 포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메콩강에서의 프랑스 선박 통행을 보장하며, 3개 항구(다낭, 꽝옌, 바락)를 개항하고, 프랑스와 스페인에 100만달러의 배상금을 10년에 걸쳐 지불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비엔호아, 지아딘(사이공), 딘뜨엉(미토) 등 남부 3개 성을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으며, 이는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식민지의 시작을 의미했다.[47] 이후 프랑스는 1867년 쩌우독, 하띠엔, 빈롱 3개 성을 추가로 할양받았고,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코친차이나 6개 성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49] 뜨득 황제는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 이후 내부 반란 세력인 레바오프엉을 진압하고 통치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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